[한국경제 이끄는 기업·기업인] (18) ‘수송왕’ 조중훈과 한진그룹

입력 2017-06-05 09:01   수정 2017-06-05 10:58

해방 직후 트럭 한 대 사서 운수업 시작
군수품 수송·대한항공공사 맡아 '대성공'




■ 기억해 주세요^^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은 독특하게 수송 부문에서 사업 기회를 포착했다. 대한항공, (주)한진, 한진고속은 대한민국의 물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산증인’이다.

우리나라의 성공한 기업들은 대개 제조업이 주력이다. 삼성과 LG는 전자제품이 주력이고 현대는 건설과 더불어 자동차와 조선을 주력으로 했다. 독특하게도 한진은 수송부문을 전문화해서 성공했다. 대한항공, 진에어, (주)한진, 한진관광 같은 곳이 한진그룹 계열사들이다. 한진해운, 한진고속 같은 운송회사도 한진그룹 소속이었는데 2000년대 이후 분리 또는 매각됐다.

제조업이 아니라 수송업?

한진그룹을 세운 기업가는 조중훈이다. 일제 강점기 때 트럭 엔진 수리하는 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그때 번 돈으로 트럭을 한 대 사서 운수업을 시작했다. 회사 이름은 한진이라 붙였다. 한민족의 전진이라는 뜻이었다.

한진의 본격적인 도약은 미군과의 비즈니스에 성공하면서 시작되었다. 6·25전쟁으로 많은 미군이 이 땅에 들어왔지만 물자 수송은 한국인에게 맡기지 않았다. 미군들은 한국인이 물건을 훔쳐가는 도둑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다. 달리는 트럭에 뛰어올라 물건을 훔쳐낼 정도였다고 한다. 조중훈은 미군에 책임 수송제를 제안했다. 수송 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모든 것을 책임져 줄 테니 안심하고 맡겨달라고 청했다. 반신반의하던 미군 담당자에게서 일감을 받아냈다. 1956년의 일이었다. 조중훈은 철저하게 약속을 지켰고 그 덕분에 미군 장교들에게 신뢰를 얻었다. 미군 장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정성껏 차린 미국식 요리를 대접했다. 조중훈에 대한 신뢰는 더욱 깊어졌다. 대접받은 미군 숫자가 5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렇게 쌓아 놓은 신뢰는 후일 월남에서의 큰 사업을 위한 발판이 되어 줬다.

월남전 수송계약을 따내다

박정희 정부는 월남전에 파병하면서 민간 기업의 진출 기회를 얻어냈다. 월남에서도 미군 물자 수송으로 큰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조중훈의 뇌리를 스쳤다. 다짜고짜 비행기를 타고 미국 워싱턴에 있는 국방성(펜타곤)을 찾았다. 예전에 한국에서 인연을 맺었던 장교들이 월남전을 책임지는 고위 장교들이 되어 있었다. 조중훈은 월남에서 군수품 수송을 하고 싶으니 기회를 달라고 청했다. 안 그래도 미군은 월남에서의 군수품 수송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차였는데 믿을 만한 조중훈이 나선 것이다. 1966년 계약이 체결됐다.

전쟁 중 군수품 수송은 또 다른 전쟁이었다. 비포장도로는 기본이었다. 항구가 없다 보니 접안 시설부터 만들면서 수송선에서 물자를 하역해야 했다. 베트콩(공산군 게릴라)의 습격도 막아내야 했다. 근로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조중훈이 직접 총을 들고 차량 대열을 지휘하기도 했다.

어려움을 극복한 대가는 달콤했다. 1971년 말 철수할 때까지 5년7개월 동안 월남에서 벌어들인 수입이 1억2000만달러였다. 1970년 우리나라 전체 수출액이 8억3000만달러였으니 정말 큰돈을 벌었다. 한진은 무명의 운수업체에서 단번에 재계 3위 대기업으로 올라섰다. 소공동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건물을 짓고 재정난에 빠진 인하대를 인수해서 교육사업에도 나섰다. 육상운송에서는 최강자가 되었으니 다음 도전 과제는 해운업으로 삼고 준비 작업에 나섰다. 미군 수송선으로부터 군수품을 하역하면서 생겨난 꿈이었다.

“적자상태인 대한항공공사 맡아줘”

그러던 차에 조중훈은 박정희 대통령의 부름을 받았다. 국영기업인 대한항공공사를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공무원들이 운영하다 보니 하루가 다르게 적자가 쌓여가고 있었다. 같이 망하게 될 거라며 회사 중역들은 결사반대했다. 하지만 대통령의 부탁이니 거절할 수 없었다. 1969년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해서 대한항공으로 이름을 바꿨다.

걱정과는 달리 민간이 경영을 시작하자 서비스는 좋아지고 비용은 줄었다. 승객도 빠르게 늘었다. 중동 건설 붐이 시작된 1970년대 중반부터는 수만명의 건설 인력이 대한항공 승객이 됐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도시로 노선도 늘리면서 세계적인 항공사가 되어갔다. 원래의 꿈이었던 해운회사도 세웠다. 지난 2월 파산선고를 받은 한진해운이다. 조선소인 한진중공업도 만들었다.

조중훈은 2002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모험의 연속이었다. 조중훈이 살아 있다면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모험을 시작했을지 궁금하다.

김정호 <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kim.chungho@gmail.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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